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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소리소리 일기 3 - 나에게 불금은 없다

by 라소리Rassori 2020.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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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살던 동네인 대전 둔산동은 밤만 되면 사람들이 술에 취해서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많이 들렸다. 건물 아래 어딘가에서 나는 소리인데 워낙 요란해서 내가 사는 고층까지 생생하게 들렸다. 술주정하는 소리 (가끔), 싸우는 소리 (가끔), 통곡하는 소리(1년에 2번 정도), 목이 터져라 노래하는 소리(자주) 등 다양한 소리가 시간을 가리지 않고 울려 퍼졌다.

2,30대가 많은 도심이다 보니 그 에너지 또한 꽤나 박력 넘쳤다. 술기운 때문이겠지만 그런 소리들을 낼 수 있는 배짱이 참 대단하게 느껴졌다.

물론 보통 때는 그런 소리보다는 평범하게 웃고 떠드는 소리가 많이 들렸다. 소음에 민감한 편이지만 사람들이 들떠 있는 소리는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송도로 이사 온 뒤엔 그런 소리가 가위로 싹둑 자른 것처럼 사라졌다. 주위가 고요했다. 어색하면서도 좋았고, 좋으면서도 조금 허전하기도 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조용했던 건 시기가 2월이어서 추워서 그랬을 뿐이었다. 기온이 올라가면서 점점 소음이 늘어가기 시작했다. 술 먹고 웃고 떠드는 소리가 건물 아래쪽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대전과 같은 패턴이었다.

특히 주말 밤만 되면 평소보다 더 주변이 들썩거렸다. 굉장히 성가신 소리들이 간간이 섞여 들기도 했다. 한번은 어떤 젊은 목소리가 동네가 떠나가도록 "생일 축하해!"를 길게 세 번이나 외쳤다. 어딘가에서는 남자들끼리 싸움이 붙었는지 쌍욕이 밤하늘에 울려 퍼지기도 했다.


지난 금요일 밤에도 여지없이 동네가 시끌벅적해졌다. 주위에 고깃집, 횟집, 족발집 등 다양한 가게들이 있는데 주말이면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모양이다.

나는 오래전에 술을 끊었지만 소싯적에는 꽤 많이 마시던 사람이었다. 취해서 시끄럽게 떠들고 놀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것에 전혀 흥미가 없어지면서 독서나 외국어 공부 등 취미 생활에 돌입하게 되었다.

2019년 11월에 티스토리 블로그와 유튜브를 시작하고부터는 취미가 블로그 포스팅과 유튜브 영상을 만드는 것으로 바뀌었다. 주말이든 휴일이든 상관없이 늘 폰이나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생활이 이어졌다.


그날 밤에도 그렇게 평소와 같은 일상을 보내는 중이었다. 밤 9시가 되어가고 있을 때쯤 갑자기 폰이 울렸다. 화면을 보니 지인A였다. 이 시간에 웬일인가 싶어서 불안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라소리: 어.


지인A:
집에 불 켜져 있네? 방에도 불 켜져 있고.

라소리:
?!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지인A: 보이니까 알지. 건물 전체 불 꺼져 있는데 혼자만 켜져 있어. (분명 과장이다.)

라소리: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아까도 위층에 사람 돌아다니는 소리 들렸는데.


지인A: 어쨌든 지금은 위층도 불 꺼져 있어.


라소리: 아니 대체 뭘 하길래 남의 집 불 켜진 것까지 보고 있어?


지인A: 친구들이랑 술 마시고 있지.


라소리: 술 마시는데서 우리 집이 보여??


지인A: 보이네.


라소리: 아 짜증 나.


지인A: 크하하! 다 불 꺼졌는데 너희 집만 켜져 있어.


라소리: 참나 별게 다 웃기네. 근데 안주 뭐 먹는데?


지인A: 모듬전.


라소리: (맛있겠다.) 전화는 왜 했어?


지인A: 불금인데 혼자만 불 켜져 있는 거 웃겨서.


라소리: 헐 정말 쓸데없네. 끊는다.


지인A: 크하핰!



정말 유치하게 별걸로 다 놀린다. 겨우 그 정도로 내가 자극을 받을 줄 아나 보다.

예전 같으면 남들은 다 밖에서 놀 때 나만 혼자 집에 있었다면 조금은 신경이 쓰였겠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선택이기 때문이다. 나도 놀려면 얼마든지 놀 수 있는 사람이라고. 술 먹으면서 노는 건 내 인생에서 이미 충분히 넘치도록 해봤기 때문에 더는 안 할 뿐이다.

그나저나 낮 시간에 밖에서 건물을 올려다봐도 어느 게 내 집인지 찾기 힘들던데 지인A는 참 눈도 좋다. 뭐 이런 지인이 다 있을까? 앞으로는 계속 이런 식으로 주말에도 집에서 블로그 하고 있는 거 들키는 건가? 이건 뭐 사생활이 없네. 뭐 이래!


마무리는 내가 뭐 먹냐고 물어봤을 때 지인A가 보내준 모듬전 사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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