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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쓰기 프로젝트/그림일기

2020년 6월 18일 그림일기 - 외모지상주의의 몰락과 영원성

by 라소리Rassori 2020.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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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빠르게 흐르면서 세상에 급격한 변화들이 일어나는 중에 문득문득 유난히 피부에 와닿는 변화들이 있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한 것도 그렇지만 종종 그보다 더 놀랍게 느껴지는 것은 사람들의 사회적 인식 수준의 변화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외모에 대한 인식이 많이 변해가고 있는 것을 느낀다. 아직 완벽한 수준까지는 아니어도 상당한 변화가 진행 중인 것은 분명하다. 외모지상주의라는 표현이 꽤 오래전부터 잘 안 쓰이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웹툰 제외)

더 옛날에도 그랬겠지만 80-90년대만해도 외적인 단점을 가지고 사람을 비하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21세기에 들어선 이후에도 못생긴 사람은 종종 "폭탄"으로 분류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폭탄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쏟곤 했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세상에 놓이다 보니 그것이 잘못된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뿐더러 오히려 재미로 여겼다. 세상은 언제까지나 그럴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외모를 비하하는 말을 듣기 어려워지게 되었다. 조금씩이지만 점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되어가고 있다. 이제는 외모만을 가지고 사람을 깎아내리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만 수준 낮은 사람이 되어버린다. 나 또한 언젠가부터 무의식적으로 입조심을 하게 되었다.


물론 예외는 있다. 아주 친한 사람들끼리 서로 외모로 놀리는 것은 또 다른 얘기가 된다. 한쪽이 원치 않을 경우엔 몰라도 서로 즐긴다면 굳이 참을 이유는 없는 듯하다.

내 경우 나이를 먹으면서 놀리는 강도가 많이 약해지긴 했어도 아직까지도 그렇게 서로 놀리는 사이가 몇 남아 있다. 지인A와도 그렇고, 그보다 더 심한 사이도 있다. 바로 이번 얘기의 주인공인 친구D이다.

외모지상주의가 정점을 이루던 시절에 그것의 심각성을 전혀 모르고 지냈던 우리 둘은 늘 서로의 단점을 찾아서 놀리고, 별명을 붙이고, 싸우고, 장난치고, 농담하고,를 반복했다. 서로를 놀리지 않고 지나가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우리는 둘 다 미술을 전공했는데(나는 오래전에 미술을 때려쳤지만), 미술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얌전하게 튀지 않는 사람도 많은 반면 그 못지않게 괴짜도 많다. D는 전형적인 예술 쪽 괴짜다. 사람들은 나도 그렇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 나는 최소한 평소엔 별로 그렇지 않다. 다만 D를 만나면 조금 다른 캐릭터가 나오긴 한다.

미술인(또는 예술인)끼리는 서로 만나는 순간부터 공기에 돌기 시작하는 특유의 기운이 있다. 나는 D와 만날 때면 그것이 최고치가 되는 것을 느낀다. 둘이 만나는 순간 둘만의 세상이 열리고, 독특한 분위기 속에서 남들과는 하지 않는 대화가 시작된다. 극히 심오한 얘기가 오갈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지독하게 시시한 얘기와 함께 킬킬거리는 소리가 오간다. 


아주 옛날, 철없던 시절의 우리의 대화를 하나 예로 들자면 이런 게 있었다.

라소리: 야, 안여돼!

친구D: 뭐?

라소리: 안.여.돼!

친구D: 안여돼가 뭐야?


라소리: 너잖아. 안경 여드름 돼지. ㅋㅋㅋ

친구D: 이ㅆ!!! (D는 입이 거칠다. 근데 진짜 안여돼였다. 거기다 송곳니 쪽에는 이가 빠진 것 같은 큰 틈이 있어서 웃으면 약간 빙구 같았다. 과거형으로 썼는데 지금도 그렇다.)
 

(머리숱도 없었다. 지금은 더 없고.)


물론 나만 놀린 게 아니라 D도 만만찮게 나를 놀렸다. 그런 사이이다 보니 어른이 되어서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만나기만 하면 서로의 단점을 갖고 놀리게 된다. 다른 데서는 그러지 않아도 둘만 있을 때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버린다.

좀 더 나이가 든 후의 짧은 대화를 하나 예로 들자면 이런 게 있다.

(9년 만의 재회)

친구D: Jon나 늙었네.

라소리: 이런 미친.

세상은 바뀌었어도 D와 나는 만나기만 하면 옛날 그 수준 낮은 시절로 돌아간다. "이야, 어떻게 하나도 안 늙었네!" 라든가, "정말 동안이다!" 라든가 하는 립서비스는 서로 일절 하지 않는다. 우리에겐 그게 가장 자연스럽다. 솔직히 말해줘서 오히려 좋기도 하다. 아마 할머니가 되어서도 여전할 것이다.


*D와는 코로나와 D의 직장 일 때문에 오래오래 못 만나고 있습니다.

*D 얘기는 인터넷에 해도 된다고 허락받았어요. 안여돼 얘기는 해도 되는데 이빨 빈 공간 얘기는 못하게 해서 잠시 설득을 해야 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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