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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쓰기 프로젝트/그림일기

2020년 8월 8일 그림일기 - 면도

by 라소리Rassori 2020.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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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눈썹이 진하다. 머리숱도 많고, 팔다리에도 적지 않은 털이 나 있다. 나이가 들면서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보통 이상은 된다.

그냥 두면 보기에 좀 그래서 샤워할 때면 면도를 열심히 하는 편이다. 안 미는 게 자연스럽다는 이유로 그대로 두는 사람들도 있지만 난 털이 올라오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남의 털은 상관없는데 내 털은 보기가 싫다.

털 중에서도 겨드랑이 털은 정말 미워 보인다. 그다음으로 참을 수 없는 것은 팔에 난 털이다.

지금은 아니지만 20대까지의 내 팔 털은 정말 굉장했다. 그럼에도 그 당시에는 선뜻 밀기가 두려웠다. 괜히 밀었다가 굵고 까만 털들이 가득히 올라온다면 정말 골치 아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늘 신경이 쓰이는데도 손을 대지 못하니 여름만 되면 자꾸 팔을 의식하게 되었다. 미국에 사는 동안엔 특히나 더 고민이 많았다. 미국 여자들은 면도에 많은 신경을 쓰는데 난 그냥 이렇게 다녀도 되나 싶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대학 때는 같은 수업을 듣는 다른 여자들의 팔을 유심히 관찰했다. 미는 여자도 있고 안 미는 여자도 있었다. 안 미는 여자들은 보통 피부색과 털색이 비슷해서 잘 보이지 않는 경우였다. 나 같은 동양인 피부에 새카만 털은 보여도 너무 잘 보였다.

그러다 한 브라질 친구의 팔을 보게 되었다. 피부색은 동양인보다 약간 더 어두운데 새카만 털이 수북하게 덮여 있었다. 내 털의 5배는 되는 양이었다. 예쁘고 날씬하고 키도 큰 친구였는데 팔만 보면 야수였다.

그 친구를 보면서 나는 그냥 안 밀고 있어도 되겠다고 안심하게 되었다. 한국인들 중에서는 나에게 팔 털 좀 어떻게 하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냥 무시하고 지냈다. 

그러다 나이가 좀 더 들면서 털의 양이 확 줄어들기 시작했다. 굵기도 많이 가늘어졌다. 이 정도라면 팔 털을 한번 밀어 봐도 괜찮겠다 싶었다. 이제는 밀었다가 조금 자라게 둬도 크게 보기 싫을 것 같진 않았다.

밀어 보니 썩 괜찮았다. 내 팔이 내 팔이 아닌 것 같았다. 진작 밀걸 그랬나 싶기도 했다.

그 후로부터는 샤워를 할 때면 항상 팔 털을 밀게 되었다. 문제는 나는 샤워를 할 때마다 너무 깊은 생각에 빠진다는 것이다.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 보면 실수가 많아진다. 특히 면도를 일부 빠뜨릴 때가 종종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면도뿐 아니라 어떨 땐 등을 씻는 걸 깜박할 때도 있다. 나는 등을 가장 마지막에 씻기 때문에 등을 안 씻고 나오는 일이 가끔 있다. 그럴 때면 어쩔 수 없이 다시 욕실에 들어가야 한다. 어떨 때는 반대로 등을 두 번 씻을 때도 있다. 안 씻었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씻고 있는데, 씻는 도중에 이미 씻었다는 것이 생각이 나는 것이다.

 

어쨌든 오늘도 면도는 계속된다. 열심히 밀어서 없애긴 해도 난 내 털이 싫지는 않다. 털이 풍성하던 시절엔 싫을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제는 털이 그만 가늘어지고 그만 줄어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 동생은 몇 년 전부터 탈모 방지약을 열심히 먹던데 나도 슬슬 먹어줘야 하지 않나 싶다. 탈모약은 아차 싶을 때 먹기 시작하면 이미 늦은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숱 많던 내가 탈모약 복용을 고려하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나이가 든다는 것. 그것은 나와 전혀 상관없을 것 같던 세상이 끊임없이 열리는 일이다.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때마다 충격을 받게 된다. 분명 언젠간 탈모의 세계도 열릴 테다. 너무 충격받지 않게 미리 조금씩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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