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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소리소리 일기 8 - 뽑기 기계 앞에서의 망상 (B급 로맨스 소설 주의)

by 라소리Rassori 2020.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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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보던 가게가 보였다. 새로 생긴 곳인지 단순히 내가 지금껏 못 봤던 건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캡슐 뽑기를 좋아해서 캡슐 뽑기 기계가 있으면 당장 동전을 넣고 손잡이를 돌리고 싶은 유혹에 빠져든다.

이곳에는 캡슐 기계가 없었다.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아쉬웠다.

루피와 꼬부기는 탐난다. 그래도 캡슐 뽑기가 아닌 이상 하지 않는다. 괜히 돈 잃고 열만 받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Take Your Luck!" 퍼니박스 Funny Box, 5,000원.

일단 흥미는 쏠린다. 그래도 이렇게 아예 다 가려둔 건 왠지 안 하게 된다. 


기계 뒷쪽을 보니 빈 박스가 세 개 있었다. 이런 걸 하는 사람들도 있다니 신기했다. 뭐가 나왔을지 너무 궁금하기도 하고.


쓰레기를 이렇게 버린 건 참... 너무했다. 담배꽁초도.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걸 보니 갑자기 창작 욕구가 발동한다.

 



어떤 남녀가 여기 온 거야. 두 사람은 과외 선생님과 제자의 관계. 여자애가 제자이고 고3이야. 남자는 명문대 의대생. 여자애 부모님이 고르고 고른 과외 선생님이다 보니 학벌도 좋고 사람도 괜찮아.

제자는 얼마 전 수능을 마쳤어. 이제 과외는 끝인 거지.

선생은 제자에게 마지막이라고 점심을 사줘. 두 사람은 식사 후에 이 뽑기 가게를 지나가게 돼.

"선생님, 나 이거 해보고 싶어요!" 제자가 퍼니박스 기계를 가리키면서 외쳐.


"어, 해." 선생이 말해.

선생은 키 크고 허여멀건 모범생 스타일이야. 제자는 그보단 좀 더 건강해 보이는 분위기. 단아하게 생겼고 공부도 잘해. 성격이 해맑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 예뻐.

선생이 하라고 하니 제자는 신나서 기계 앞에 서. 선생이 옆에 다가와서 카드로 결제를 해줘.

"선생님이 뽑아주세요!"

실은 선생이 뽑아준 걸 갖고 싶은 속마음.

선생은 별생각 없이 화살표를 대충 눌러서 박스를 뽑아줘.

뽑기 한 게 튀어나왔어. 제자가 들뜬 얼굴로 박스를 열어봐.

내용물은 양쪽 귀가 밑으로 길게 처져 있는 귀여운 동물 인형 모자야. 제자가 킥킥 웃으면서 장난으로 "선생님한테 어울리겠는데요?" 하고 선생에게 건네줘. 선생은 머쓱하게 피식 웃더니 제자에게 가까이 다가서서는 양손으로 모자를 푹 씌워줘.

그런 건 전혀 예상 못했던 순진한 제자. 얼굴이 화끈해지는 걸 느끼며 살짝 휘청거려. 선생 가슴팍에서 약한 향수 냄새가 풍겨와.

"저도 하나 뽑을래요."

얼굴이 빨개진 채로 제자는 기계 앞에 가서 서. 선생은 또 카드를 긁어줘. 박스가 나왔어.

"하나 더요."

도무지 정신이 차려지질 않아서 제자는 나오는 대로 말을 던져. 선생은 허리를 숙여서 박스를 꺼낸 뒤 또 카드를 긁어줘. 로맨스 소설 남주가 대부분 그렇듯 얘도 부자라서 돈 아무리 써도 괜찮아.

이번에 나온 박스는 제자가 허리를 숙여서 꺼내. 가슴이 너무 뛰어서 여전히 머릿속은 새하얀 상태야.

둘 다 박스를 하나씩 들고 있는 상태에서 제자가 먼저 박스를 열었는데 박스에서 빨간 하트 쿠션 키홀더가 나왔어. 폭신폭신한 키홀더의 감촉이 꽤 좋아. 잠시 만지작거리던 제자는 그걸 선생한테 내밀어.

"모자 저 주셨으니까 이건 선생님 가지세요."

한 마디로 내 마음 너 가져라 이거지.

물론 선생은 제자의 그런 속마음까지는 몰라. 그냥 난처해하면서 "내가 이런 걸 어떻게 하고 다녀? 너 가져." 하면서 거절해. 살짝 시무룩해진 제자. 선생은 제자의 표정에 내심 미안해져.

"그럼 선생님이 들고 있는 박스에 들어 있는 건 선생님이 가지셔야 해요. 제가 드리는 선물이에요."

제자가 말하자 선생은 알았다고 하면서 자기가 들고 있는 박스를 열어봐. 그런데 똑같은 빨간 하트 쿠션 키홀더야.

"받아주시기로 했어요!"

제자가 키홀더를 흔들면서 환하게 웃어. 그 미소를 보는 순간 갑자기 심장이 쿵~ 하고 울리는 것을 느낀 선생. 잠시 숨을 멈추면서 당황한 듯 눈을 깜박거려.

이때 별안간 멀리서 여자애 아버지가 성큼성큼 다가와. 두 사람의 분위기가 심상찮은 것을 본 아버지의 인상이 별로 좋지 않아.

"앗, 선생님! 저기 아빠 와요! 뛰어요!"

제자는 자기도 모르게 선생 손을 꽉 쥐고는 뛰어. 뛰면서 "지금 왜 뛰는 거지?"하고 생각하지만 이미 늦었어. "으악, 손을 잡아버렸네,"하고도 생각하지만 그것도 되돌리기엔 이미 늦었어.


빈 박스들도 버려야 하는데 너무 놀라서 전부 바닥에 떨어트리고 그대로 줄행랑.

둘이 손까지 잡은 걸 본 아버지는 두 사람이 서 있던 자리에 서서 담배를 물어. 자신의 소중한 딸을 꼬드긴 선생을 죽여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이를 빡빡 갈아.

그런데 그 순간 멀리서 아내, 즉 여자애 엄마가 무서운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게 보여. 아버지는 이번 결혼기념일 선물로 아내의 가장 큰 소원인 금연을 하기로 약속해둔 상태.

담배 피우는 모습만은 절대 안 들키려 했던 아버지는 너무 놀라서 담배를 떨어트린 채로 줄행랑을 쳐.

그 직후 라소리란 사람이 저기에 도착,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저 사진을 찍게 돼. 이제 저 쓰레기들을 제대로 버릴 수 없었던 상황이 설명이 되는 거야.

추리 끝내준다. 잠깐. 결국 지금까지 내가 한 건 로맨스 소설을 쓴 게 아니라 추리였나... 헷갈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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