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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쓰기 프로젝트/그림일기

2020년 3월 31일 그림일기 - T팬티

by 라소리Rassori 2020.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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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일기는 지난달 이사했던 당일의 이야기이다.

그날 나는 긴장해서 새벽 6시부터 일어나 있었고, 이사는 아침 8시부터 시작되었다. 포장이사였기 때문에 짐을 대충만 정리해두어서 집 여기저기에 물건이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물론 속옷 등 이삿짐센터 분들에게 보이기 뭣한 물건들은 미리 박스에 정리해서 잘 넣어두었다. 바로바로 플라스틱 박스에 싣기만 하면 되도록 대충의 준비를 해두었다. 외투와 니트처럼 부피가 큰 옷들은 전부 모아서 산처럼 높이 쌓아두었다.

시간이 지나고 이사가 시작되었다. 짐이 하나씩 사라지면서 발 디딜 곳 없던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산처럼 쌓아둔 옷이 모두 박스로 옮겨졌을 때 쯤이었다. 별로 눈에 익숙하지 않은 작은 천 쪼가리 하나가 바닥에 뒹구는 것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저게 뭐지? 하고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내가 그것이 뭔지 눈치채는 순간 이삿짐센터 사장님의 시선도 그것을 향했다.


그 즉시 빛의 속도로 뛰었다.


소리를 안 질렀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미 질러버렸고, 그것은 그 천 쪼가리가 속옷이란 걸 증명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아무도 내가 왜 소리를 질렀는지 묻지 않았다. 그 후로 썰렁해진 분위기 속에서 모두 입을 꾹 닫은 채로 이사는 척척 진행이 되었다.

이게 참 억울한 것이, 나는 티팬티를 입지 않는다는 거다. 문제의 티팬티는 내가 미국에서 살던 시절 빅토리아 시크릿에서 세일할때 샀던 것이다. 그냥 깔끔한 게 예뻐 보여서 한 번 사봤던 거다.

그런데 대체 왜 그것만 내가 속옷을 정리할 때 빠졌던 걸까. 일반 팬티보다 천이 적은 데다가 미끄러운 실크 재질이어서 정리할 때 스르륵 빠져나갔던 걸까.


어쨌든 새집까지 따라온 그 티팬티는 지금 서랍 깊숙이 처박혀 있다. 왠지 그런 속옷도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사긴 했지만 원래부터 티팬티는 불편해서 입지 않는다. 그걸 입고 바지를 입었을 때 힙라인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도 싫어한다.

예전에 한 한국 친구에게 티팬티를 선물한 적이 있다. "세상에 이렇게 편한 팬티가 있다니! 이건 신세계야. 앞으로 난 티팬티만 입을 거야!"라는 친구의 반응에 무척 신기해했었다. 이게 맞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 같다. 나는 아니다.

이삿짐센터 사장님, 그거 제가 평소에 입고 다니는 팬티 아니었어요. 정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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