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올린 얘기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기껏 귀뚜라미들을 키울 공간을 만들었는데요, 원래도 임시로 쓸 계획이었지만 몇 시간도 안 되어 한계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귀찮은 일은 웬만하면 하지 않는 제가 바로 집을 박차고 나가서 다이소를 향하게 되었죠. 귀뚜라미를 키울 리빙박스(수납박스)를 사기 위해서였습니다. 종이 박스 안쪽에 둘러둔 테이프 사이로 핀헤드들이 파고드는 문제도 있었지만 방에 그런 것이 두 개나 있으니 너무 보기가 싫어서 빠른 대책이 필요했습니다.
대충 보니 귀뚜라미를 키우려면 높이는 최소한 25센티는 넘어야 할 것 같았고, 가로나 폭도 그 정도면 좋을 것으로 보였습니다. 물론 그렇게 제가 딱 원하는 사이즈는 리빙박스로 나오지 않겠죠. 결국 한쪽 길이를 포기하기로 하고 아래의 물건을 두 개 사게 되었습니다.
사이즈가 37.5 x 25.5 x 22cm인데 37.5 부분이 높이가 아닌 것이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썩 괜찮은 편이라 생각하고 얼른 사들고 집으로 왔습니다. 뚜껑은 꽉꽉 닫는 게 아니라 살짝 얹는 식입니다. 내부는 아래 사진을 참고해주세요. 곤충이 올라오지 못하게 미끄러우면 좋은데 그다지 미끄럽진 않습니다.
우선 작은 놈들부터 옮겼습니다. 역시 미친 듯이 기어올라 오길래 급하게 맨 위쪽에 테이프를 둘렀습니다. 박스가 25.5cm라는 높이는 좋은데 가로가 너무 깁니다. 그래도 공간이 넓은 만큼 부분적으로 청소하긴 편할 듯합니다.
조그만 것들이 웃기게도 테이프는 밟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또 틈을 파고 들어가서 저의 속을 뒤집어 놓습니다. 아래 사진에 저 트리오는 결국 끝까지 들어가는 바람에 한 놈 빼고는 구해내지 못했습니다. 저 부분은 당연히 떼어내서 다시 붙여야 했습니다. 귀뚜라미를 제 삶에 들인 이후 뭔가 매일 도를 닦는 기분이 듭니다. 이러다 조만간 정말 도인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테이프 부분에서 딱 멈추는 게 참 신기하죠? 밟으면 미끄러울 거라는 걸 아는 건지 대체 무슨 원리인지 모르겠습니다.
큰 녀석들의 집은 이런 상황입니다. 그리 나쁜 사이즈는 아닌데 공간을 많이 차지한다는 점이 불만입니다. 먹이 곤충들이 이렇게 많은 공간을 차지해버리다니. 그래도 귀여운 절지동물을 키우려면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겠죠.
신기한 것은 이 녀석들은 핀헤드 무리와는 달리 대부분 통 위로 올라오는 것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혹시 몰라서 이 통 역시 맨 위에 테이프를 둘러두었는데 거기까지 올라오는 녀석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계란판 3층을 분비물을 털어가면서 옮겼는데 마지막 층에 보니 누가 스티로폼을 한 조각 옮겨다 놓은 것이 보입니다. 개미처럼 자기가 먹을 것을 보금자리로 옮기는 건 귀엽긴 한데 스티로폼 조각을 보니 또 슬며시 혈압이 오릅니다.
스티로폼을 확실히 먹은 것으로 보이는 2cm급 귀뚜라미들은 골라내서 처치를 했는데 작은 사이즈들도 만약 먹었다면 빨리 변으로 뽑아내 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스티로폼 박스에 이틀 있었던 이 귀뚜라미들은 당분간은 쓸 일이 없는 것이 그나마 다행입니다. 핀헤드 박스에 있는 귀뚜라미들만으로도 한참을 쓸 것 같습니다.
박스 위는 망으로 덮고, 일부는 납작한 판 같은 걸로 덮어서 먹이 줄 때 열고 닫고 할 생각입니다. 부드러운 망은 양면 테이프로 붙여놨더니 자꾸 떨어져서 이 사진을 찍은 이후에 까맣고 딱딱한 루바망(화분 깔망)으로 교체했습니다. 다이소나 꽃집에서 살 수 있는데 촘촘하고 큰 게 있으면 잘라서 쓰기에 좋습니다.
손님이 올 경우엔 잽싸게 뚜껑을 닫아서 이렇게 치워둘 계획입니다. 부디 귀뚜라미들이 바스락거리지 않길 바라야겠죠.
핀헤드 통은 뚜껑을 일부만 빼고 닫아놓았는데 몇 시간 후 열어보니 모두 밑으로 내려가 있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어두워지면 밖으로 향하는 것에 관심이 없어지는 듯합니다. 벽이 완전히 깨끗해졌죠?
뚜껑이 오픈되어 있는 부분은 빛이 들어와서인지 위로 기어오르는 녀석들이 계속해서 보입니다.
사실상 오늘 얘기는 고난의 귀뚜라미 사육 시리즈에 포함되어야 할 내용이지만 그냥 그렇게 적지 않았습니다. 너무 힘들어 보여서 괜히 많은 분들이 귀뚜라미 사육을 포기하면 안 되니까요. 요령만 알면 할 만한데 저는 요령을 깨닫는 과정까지가 힘들었을 뿐입니다. 토요일 이후부터는 귀뚜라미들이 아주 잘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청소를 잘해주고, 신선한 먹이를 부족함 없이 제공해주고, 계란판을 보이는 대로 집어올 일만 남았습니다.
파충류의 경우엔 먹이 곤충 대신 사료처럼 먹일 수 있는 제품들이 나오던데 그것이 절지동물에게도 장기적으로 괜찮은지 모르겠습니다. 얼마전 다흑님의 영상을 보니 지네와 타란툴라가 귀뚜라미 분말이 재료인 푸디 크리(FOODY-CRI)라는 제품을 먹긴 하더군요. 생 귀뚜라미 대신 그것을 먹여도 된다면 귀뚜라미 사육할 필요 없이 너무 편하고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생 귀뚜라미 피딩을 포기할 수는 없죠. 해보는 데까지는 해볼 생각입니다. 귀뚜라미를 좋아하는 저희 사마귀와 타란툴라 유체들을 보면서 힘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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