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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소리소리 일기 2 - 빨래방의 외국 남자

by 라소리Rassori 2020.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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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빨래방에 갔을 때의 일이다.

빨래방에서 빨래가 다 되길 기다리다 보면 보통 폰으로 이것저것 하게 되는데, 이날은 빨래방에 있는 약 한 시간 10분 동안 유튜브 편집을 했다. 집에 있을 땐 정말 하기 싫은 일이지만 빨래방에서는 신기하게도 집중이 잘 되면서 힘들지 않게 하게 된다.


일단 시작하면 눈을 떼기 힘든 일이다 보니 이날도 시간이 흐르는 걸 느끼지도 못한 채 빨래가 다 끝나버렸다. 건조기가 종료를 알리는 기계음을 내고 있었지만 바로 편집 앱(Viva Video)을 닫기엔 애매한 시점이었다.

나는 빨래를 꺼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면서도 계속 폰에서 눈을 떼지 않고 편집을 했다. 마침 사람이 없어서 건조대 앞에 가만히 선 채로 그대로 하던 걸 이어갔다.


그렇게 한 10분 가까이 흘렀을까, 드디어 원하는 부분까지 마무리하고 폰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뿌듯한 기분으로 뽀송하게 마른 빨래를 가방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빨래를 다 옮긴 뒤엔 빠트린 게 없는지 건조기 안을 꼼꼼히 확인했다. 그 순간 한 중년의 백인 남자가 빨래방으로 들어섰다. (송도는 외국인이 많이 산다.)

대놓고 어리바리해하며 두리번거리는 모습. 이방인 특유의 어딘가 살짝 기죽은 눈빛. 누군가 좀 도와달라는 무언의 외침. 

찰나의 압박감을 무시하지 못하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쳐 주었다.



라소리: (백만년만의 영어 사용) 여기 처음 왔어?

남: 어, 으응...


라소리: 자주 올거면 카드 만드는 게 이득인데. 자주 올 거야?


남: 아니, 그럴 것 같진 않아.


라소리: 그럼 여기다 지폐 집어넣고 동전 교환해. 여기 적혀 있지? Coin Exchange Machine이라고.


남: 오, 오케이.


라소리: 난 보통 따뜻한 물로 해서 5,500원짜리 세탁해. 가장 싼 건 5,000 찬물 세탁이야. 더 비싼 것도 있고. 뭐하고 싶은데?


남: 젤 싼 거.


라소리: 오케이. 일단 빨래 넣어.


남: (정말 적은 양의 빨래를 넣음. 대충 티셔츠 2개랑 바지 하나랑 속옷 하나 정도의 양. 이불 세 개도 들어가는 큰 세탁기인데 좀 모아서 들고 올 것이지.)


라소리: 문 닫고, 동전 넣고. 동전 넣을 때마다 금액 바뀌는 거 잘 지켜봐. 0이 될 때까지 넣으면 돼. (불안해서 동전 넣는 거 지켜봄. 역시나 하나 더 넣으려고 해서 아슬아슬하게 막음) 앗, 거기까지! 이제 됐다! 여기 시간 나온 대로 기다리기만 하면 돼. 건조기는 30분 정도 돌리면 충분할 거야.


남: 완죤 고마워.


라소리: 노 프라블럼.

 



...약 열흘 전 그런 일이 있었는데, 세상에, 오늘 빨래방 가는 길에 그 남자가 다른 백인남이랑 같이 수다를 떨면서 내 앞을 지나가는 거다. 그래서 잽싸게 시선을 돌리고는 얼른 갈길을 갔다.

아는 얼굴이어도 Hi 하고 인사를 하기도 그렇고, 눈인사하기도 그렇고, 이런 경우는 완전 애매해.

그런데 그 남자들, 마스크를 안 끼고 있었다. 난 끼고 있었기 때문에 어쩌면 그쪽에선 날 못 알아봤을수도.

아무튼 같은 동네에 얼굴 아는 사람들이 자꾸 늘어나는 건 별로 원치 않는다. 난 거지 몰골로 자유롭게 동네를 돌아다니고 싶다구.

 



이제 빨래방 도착.

세탁기 3개가 다 돌아가고 있는 운 나쁜 상황. 최근엔 계속 3개 다 비어있었는데 타이밍 너무 잘못 맞춰 왔다.

 

물티슈 설마 그냥 주는 걸까? 신기하네. 하나 챙겨 가야지.


다행히 10분쯤 후 3번 세탁기가 비어서 세탁기를 돌릴 수 있게 되었다.

다 되면 4번 건조기에 돌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누군가 와서 마른 이불을 넣고 돌리기 시작했다. 이불의 세균을 이렇게 죽이기도 하는구나. 뜨거운 열에 세균이 죽긴 하겠지만 난 물세탁한 뒤에 건조해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아. 
 


세탁을 마친지 약 5분 만에 5번 건조기가 비어서 넣을 수 있었다.

그런데... 저번 워시엔조이 후기 올렸을 때도 그랬는데 이번에도 1번 세탁기 돌린 사람이 내가 빨래방에 머물렀던 1시간 반 동안 끝까지 빨래를 꺼내러 오지 않았다. 이런 사람들은 벌금을 좀 물리든지 해야 하지 않을까?


대전에서 크린토피아 빨래방 갈 땐 남자 사장님이 엄청 예민해서 갈 때마다 불편했는데 여긴 질서가 이렇게 안 지켜지는 일이 많다 보니 오히려 사장님이 없는 게 더 불편하다. 예민 폭발 사장님이라도 좋으니 여기는 누가 좀 있었으면 좋겠다.

어쨌거나 뽀송하고 향긋한 이불과 수건 때문에 기분이 뿌듯한 날이다. 샤워한 뒤 수건 쓸 때 끝부분에 아주 약간만 쉰내가 나도 기분이 망쳐지는데 건조기에 돌리면 그럴 일이 없다. 다음에 갈 땐 겨울 이불을 빨아서 안 보이는 데로 치워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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