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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소리소리 일기 5 - 벌레 약 치는 날 (ft. 에이스 침대)

by 라소리Rassori 2020.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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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제목을 "주절주절 일기"에서 "소리소리 일기"로 바꾸었습니다. 오늘도 벌레 사진 주의해 주세요. 🤭

 



아파트 사무실에서 사람이 와서 일일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소독약을 치는 날이었다. 한 3개월 전쯤에도 소독하는 분이 오셨는데 그때는 "저는 곤충을 키우기 때문에 집에 약을 치면 안 돼요"하고 말하고 소독을 하지 않았다. 자세한 사정을 얘기한 것은 수긍할만한 이유를 대지 않으면 무조건 소독을 해야 하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의외로 소독하는 분은 더 묻는 말도 없이 그냥 "네~"하고 돌아가셨다. 아무래도 이건 가스 점검처럼 무조건 해야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괜히 곤충 얘기까지 했다 싶었다.

이번에도 소독하는 분이 문앞에서 벨을 누르셨다. 이번엔 곤충 얘기는 하지 않고 그냥 소독을 하지 않겠다고만 말했다. 다행히 저번처럼 간단하게 "네!"하고 그냥 돌아가 주셨다.

그날은 벌레 몇 마리가 현관에 죽어 있었다. 저번에 내가 욕실에서 구해낸 것과 똑같은 딱정벌레과의 벌레들이었다. 다른 집에서 약을 맞은 뒤 들어온 것 같았다. 아무리 여기저기 둘러봐도 어느 틈으로 들어온 건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절지동물을 키우다 보면 이렇게 생각지 못한 부분에서 영향을 받기도 한다. 남들은 다 깔끔하게 집안 소독을 하는데 나만 혜택을 못 받는 거다. 그래서 불만스럽다는 건 전혀 아니고 그냥 그렇다는 거다.

그러고 보니 이사를 온 직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이사를 온 뒤 침대를 샀는데 침대를 설치해 주시는 기사분이 침대 안에 동그란 약을 넣으시면서 그에 대해 설명을 해주셨다.

 

 


기사분: 이걸 침대에 요렇게 넣어 두면 침대 진드기가 안 생긴답니다. 모기도 못 옵니다. 안심하고 주무실 수 있어요!

라소리: 아, 그러면 빼 주세요.


기사분
: 네??


라소리
: 제가 사마귀를 키우는데 이런 게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요.

기사분: 사마귀를 키우신다고요??


라소리
: 네.

기사분: 어... 사마귀가 침대 위로도 오나요?

라소리: 네.

(잠시 어색한 침묵)

라소리: 모기를 퇴치하는 정도면 사마귀한테도 영향이 있을 것 같은데요.

기사분: (잠시 생각에 빠지심) 그렇긴 하겠네요. 그럼 빼 드릴까요?

라소리: 네, 빼 주세요.

기사분: 아, 이런 경우는 처음이네요... (약을 빼내심) 그럼 이건 제가 버려 드릴게요.


라소리: (버린다니까 또 아까움) 아니, 그냥 저 주세요. 싱크대 아래쪽에 깊숙이 넣어 두면 괜찮을 것 같아요.


기사분: 정말 그렇겠네요. (싱크대 쪽으로 가보시더니) 아, 네, 저긴 괜찮겠어요! (사마귀 어디 있는지도 모르시면서 괜찮겠다고 하시는 해맑은 긍정맨)



그렇게 기사 분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돌아가시고, 며칠 후 에이스침대에서 연락이 왔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대충 에이스침대 제품 등록인지 회원가입인지를 하고 나면 침대에 넣는 그 약을 정기적으로 세 번 공짜로 보내 준다, 뭐 그런 내용이었다.

내가 하겠다고 말하면 모든 것은 자동으로 등록이 되는 상황이었는데 나는 안 하겠다고 했다. 직원분이 당황하시면서 "네? 안 하시겠다고요?" 하고 되물었다. 그걸 공짜로 준다는데 안 받는 사람은 처음 겪는 듯한 반응이었다. 결국 내가 "곤충을 키우기 때문에 그런 걸 집에 둘 수 없다"고 말을 하니 그제야 아, 하고 이해를 하셨다.

절지동물을 키우다 보니 생각지도 못하게 살충제나 소독약의 직접적인 영향이 없는 좀 더 자연적(?)인 환경에서 살게 되었다. 예전에는 벌레가 나타나기도 전부터 살충제를 3종류나 집에 사두고 조금만 뭐가 보여도 열심히 약을 뿌려대곤 했는데 이제 그런 건 다른 세상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지금도 그 살충제들은 그대로 집에 있지만 이제는 아마 뭐가 나타나도 쓸 일이 없을 듯하다. 그리마(돈벌레)든 바퀴벌레든 뭐든 간에 말이다.

 



*그리마는 뉴저지, 바퀴벌레는 뉴욕 살 때 종종 봤는데 한국에서는 둘 다 본 적이 없다. 


*침대는 내가 다시 미국으로 갈줄 알고 안 사고 임시 침대로 버티다가 확실히 한국에서 살고 싶어지면서 결국 사게 된 것.


*소리소리 일기 1에서 구조된 그 녀석은 2020년 6월 11일 현재 확인해 보니 여전히 밥 잘 먹고 잘 지내는 중이었다. 손에 얹으니 혼신의 죽은 척 연기를 해서 살아있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gif로 만들었다. 우리 갈색거저리와는 달리 뒤집혀도 곧잘 일어난다.


*얼마 전 "뒤집어져 바둥거리는 벌레"라는 검색어로 내 블로그에 오신 분이 있었는데 그분이 이걸 보시고 조금이라도 후련해지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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