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포스팅은 절지동물 사육자와 애호가를 위한 글입니다. 부디 관심 있는 분들만 봐주시고 커다란 귀뚜라미 사진들이 있으니 주의해 주세요.
계미 지난 이야기 - 미니의 배신
3월 8일
번식Five의 사육통에 계미와 미니를 넣은 지 열흘도 안 되었을 때였어요. 계미가 누군가에게 왼쪽 더듬이를 뜯기고 말았네요. 분명 미치니의 짓이겠죠.
새로운 수컷이 들어와서 미치니가 화가 많이 났나 봐요. 아무리 그래도 너무 안쪽까지 뜯어버렸네요. 계미는 싸우지도 못하는데 말이에요.
귀뚜라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싸워요. 뒤로 돌아서서 뒷발로 차기도 하고 뒷다리로 몸을 지탱하면서 앞다리로 권투 하듯 싸우기도 해요. 권투 할 땐 보통은 펀치로 끝나지만 많이 흥분하면 이빨로 상대를 뜯을 때도 있어요. 어떤 방식이든 뒷다리가 중요한 역할을 해요. 따라서 뒷다리가 없는 계미에겐 그런 싸움 자체가 불가능한 거죠.
그냥 당하기만 했을 걸 생각하니 불쌍해서 바나나를 조금 먹였어요.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지냈는지 주자마자 허겁지겁 먹더군요.
3월 11일
번식Five 팀과 미니는 다들 오손도손 계란판 아래에 모여 사는데 계미만 왕따가 되어있어요.
다시 사육통을 분리하긴 너무 귀찮은데 저렇게 있는 걸 보니 마음이 약해집니다.
참고로 얼마 후 미니는 미치니의 애를 배어서 배가 빵빵해졌답니다.
3월 28일
계미가 왠지 곧 죽을 것 같이 힘없이 있길래 얼른 꺼내서 참외 조각을 먹였어요. 사육통 안은 언제나 음식이 가득한데 계미는 잘 못 먹고 지내나 봐요. 오죽하면 제가 무서운 것도 잊고 허겁지겁 먹더군요. 입에 물려준 거 전부 다 먹었어요.
이때 계미의 나이가 귀뚜라미로서는 슬슬 늙어 죽을 나이였어요.
귀뚜라미는 탈피 중인 동료를 먹기도 하지만 종종 죽은 동료도 먹어요. 계미를 이대로 사육통 안에서 죽게 둔다면 나머지 애들이 시체를 뜯어먹을 가능성이 있어요. 아마 완전히 죽지 않은 상태라도 움직이지만 못한다면 먹기 시작할 거예요. 죽는 입장에서는 큰 공포 속에서 마지막 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죽을 때만이라도 맘편히 죽으라고 다시 독방으로 옮겨줬어요.
이 와중에도 하나 남은 더듬이를 손으로 당겨서 그루밍을 하는군요. 먹이 곤충의 신분에서 기적처럼 벗어났다 해도 참 사는 게 쉽지 않아 보여요.
4월 19일
곧 죽을 것 같았던 게 3월 28일이었는데 여전히 살아 있어서 신기해서 찍어봤어요. 혼자 살면서도 계속 날개로 소리를 내면서 구애 행위는 이어가더군요. 또 여친을 소개해줘야 하는 건지 고민이 되기 시작했어요.
사육통을 청소하고 계미가 가장 좋아하는 밀기울과 애호박을 줬어요. 다른 건 몰라도 밥은 정말 잘 먹는 녀석이에요.
5월 19일
별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어느날 문득 "헉! 계미가 아직도 살아있어!"하면서 또 사진을 찍게 되었어요.
계미가 너무 오래 혼자 외롭게 지낸 것 같아서 새 여자친구를 소개시켜줬어요. 이때 마침 성충이 된 지 한 3일 정도 된 젊은 암컷 귀뚜라미가 있었거든요. 죽을 운명이었으나 계미의 새 여친으로서 살려주기로 했죠.
그런데 며칠 후에 보니 계미(위)가 새여친(아래)한테 하나 남은 더듬이를 반 정도 뜯겼더군요. 교미 실패는 어쩔 수 없다 해도 다치지나 말지... 역시 그대로 혼자 뒀어야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5월 20일
눌려 사는 계미 포착. 새여친이 계미의 머리를 손으로 누르고 있어요. 정말 순탄하지 않은 계미의 삶이네요. 그래도 일찌감치 먹이 곤충으로 사라지는 것보다는 나았으려나요.
5월 24일
늙어도 구애의 본능은 여전한지 계속해서 날개를 위로 들고 소리를 냅니다. 그럴 때마다 새여친은 도망가기 바쁘고요.
사람 세계에서 저랬더라면 이미 오래전에 철컹철컹 잡혀갔겠죠. 미니에게도 그러했듯 보기보다 집요한 녀석입니다.
5월 27일
계미가 쓰러져 있는 게 보였어요. 곧 죽겠다고 생각한 이후 2달이나 더 지난 후의 일이었습니다.
오후 4시 41분.
숨이 살짝 붙어 있는 계미를 냉동실 안락사 시켰습니다.
노충이 저렇게 쓰러지면 어차피 천천히 죽어갈 뿐이니 고통을 줄여주고 싶었어요. 며칠간 지속될 고통이 30초 안에 끝나는 거죠. 고통을 느낄 경우의 얘기지만요.
애기 때 저에게로 와서 2020년 1월 26일에 성충이 되었던 계미. 보통 귀뚜라미들은 그 시점에서부터 40일 정도를 더 산다고 인터넷에 나와 있더군요. 귀뚜라미 수명에 관해서는 해외 사이트에서도 다 말이 다른데 아무래도 실내에서 곱게 사육할 경우엔 수명이 많이 늘어나는 듯합니다. 저희 집의 경우 계미처럼 애완곤충으로 기른 귀뚜라미들은 다 이렇게 수명이 길었답니다.
아무튼 Goodbye, 계미! 네 개뿐인 다리로 씩씩하게 잘 사는 모습 늘 멋지고 대견했어. 힘든 세상에서 사느라 고생 많았다.
♣뒷이야기♣
미치니의 마지막 나날들
미치니가 군림하던 사육통엔 이제 미치니 또래 귀뚜라미들이 다 죽고 셋 밖에 안 남았어요. 미치니, 미니, 계미의 전 새여친 이렇게 말이에요. 셋만 있는데 사육통을 따로 관리하기 귀찮더군요. 그래서 먹이 곤충으로 쓰고 있는 애들을 그냥 미치니 사육통에 들이부어서 함께 키우기 시작했어요.
미치니는 그 속에서도 당당히 대장 노릇을 하면서 지냈어요. 그래도 역시 세월은 어쩔 수 없는지 어느 순간부터 기력이 확 떨어진 것이 보이더군요.
아무래도 곧 죽을 것 같아서 그 셋을 다시 분리했어요. 다른 애들은 몰라도 미치니는 정말 오래 살았기 때문에 죽은 뒤 어린것들에게 뜯어 먹히면 좀 그렇겠더라구요. 그래서 리스펙!의 의미로 새집에서 편한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해주었어요.
6월 20일
미니(위)와 함께 애호박을 먹고 있는 미치니(아래)예요.
계미를 배신하고 미치니에게로 간 미니는 생각보다 잘 살았어요. 미치니보다 한 달 넘게 더 어리지만 미니도 이제 많이 늙어서 오른손이 떨어지고 움직임도 많이 느려요. 미치니는 뒷발톱, 중간 발톱 전부 떨어진 상태구요.
아직 젊고 팔팔한 계미의 전 새여친은 맨날 미치니를 구박해요. 아무래도 미치니가 대장 자리를 뺏긴 것 같네요.
6월 23일
곧 죽겠다 싶더니 결국 때가 됐어요.
그 며칠 사이 계미 전 새여친한테 자신의 상징인 "꺾인 더듬이"를 뜯기고, 도망 다니느라 바빴는지 앞발도 다 떨어지고 없네요. 여섯 발 모두 발톱이 하나도 안 남아 있어요. 곤충은 너무 늙으면 발이 다 이렇게 되나 봅니다.
밤 10시 03분. 오른 손목을 살짝 까딱이는 것 말고는 전혀 움직임이 없는 상태예요. 고민할 것도 없이 냉동실 안락사를 시켰습니다.
쥐미한테도 그렇게 할 것이냐 물으신다면, 그게 쥐미를 위한 길이라 판단되면 그렇게 할 것입니다. 사람과 똑같이 생각할 일은 아니니까요. 전 사람도 안락사 찬성하는 입장이지만요.
미치니는 2020년 1월 4일에 성충이 된 녀석이니 약충 시절까지 합하면 8개월 정도를 살았다는 얘기가 돼요. 하루 종일 여러 암컷들과 어울리며 정력을 뽐내며 살길래 일찍 죽을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네요. 앞으로도 제가 키우는 귀뚜라미 중에서 이보다 더 오래 사는 귀뚜라미는 나오기 어렵지 않을까 싶어요.
미치니보다 훨씬 어린 미니는 미치니가 죽고 나서 며칠 후에 죽었어요. 계미의 전 새여친은 아직 살아있는데 예전만큼 팔팔하진 않아요.
그럼 이걸로 계미 얘기, 번식Five 얘기 마무리할게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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