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16일
*거미 사진 잔뜩 포함
카엥이(킬로브라키스 카엥 크라찬)의 기나긴 단식 투쟁과 두문불출로 걱정을 거듭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생사라도 확인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모습이 보이질 않으니 그럴 수가 없었죠. 그러다 고민 끝에 결국 카엥이의 집을 파헤쳐 보게 되었습니다. 카엥이의 집을 더 큰 것으로 바꾸어 준다는 핑계로 말이에요.
타란툴라는 탈피 때는 사육 케이지도 건들면 안 되기 때문에 만약 탈피 중이라면 카엥이는 죽을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도 일단은 흙을 파보기로 했어요. 10월 29일에 처음 왔을 때 밥을 먹고 그 뒤로 쭉 단식 중인데다가 언젠가부터는 모습도 전혀 드러내지 않았으니 한번 꺼내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었어요.
그때는 지금보다 더 사육 초보였기 때문에 초조한 게 컸던 것 같아요. 타란툴라는 강한 생명력을 갖고 있지만 유체들은 갑자기 그냥 죽어버리는 일(의문사)도 있다고 해서 더 초조했답니다.
어떤 모습이 나올지 모르니 바짝 긴장한 채로 숨도 안 쉬고 이쑤시개로 조심스레 흙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저도 모르게 비명! 갑자기 어느 순간 카엥이가 총알처럼 뛰쳐나오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시커먼 게 미친 듯이 벽을 타고 선반을 타고 달리는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죠. 달리는 방향도 제멋대로여서 전혀 예측이 안 될 뿐더러 엄청난 속도에 너무 당황스럽더군요. 타란툴라는 별로 높지 않은 곳에서 떨어져도 배가 터져 죽는 데다가, 틈새로 들어가거나 해서 영영 찾지 못할 수도 있으니 마음이 정말 급해졌어요. 이런 일이 벌어지면 침착해야 하는 걸 알고 있는데도 잘못하다간 제가 카엥이를 잡으려다 터트리겠더라고요.
그래도 다행히 어찌어찌 플라스틱 컵 안으로 쏙 들어가게 할 수 있었습니다. 속도가 꽤 빠르긴 했는데 그래도 저희 렌지(오렌지 어셈 바분)만큼 막 번개처럼 빠르지는 않았거든요. 잡고 난 뒤엔 숨돌릴 틈도 없이 급한 대로 우선 새로운 케이지에 넣어주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그 직후에 찍은 것입니다. 발에 발가락이 두 개씩 있는 모습이 너무 귀엽습니다.
하도 굶어서 배가 소멸 직전인데... 그런데 어째서인지 처음 왔을 때에 비해 훨씬 커진 느낌이 듭니다.
높이 올라가다가(그래 봤자 10cm 이하) 케이지 구석에서 몸을 웅크렸어요. 오랫동안 캄캄한데 있다가 얼마나 눈이 부셨을까요. 타란툴라는 긴장하면 앞쪽 다리 4개로 저렇게 얼굴을 감싸는데 더듬이 두 개도 꼭 다리처럼 생겨서 다리 6개가 몸 앞을 가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반짝이는 까만 독니도 보이네요. 너무 멋져서 볼 때마다 한 번 물려보고 싶다는 충동이 듭니다. 그렇게 아프지는 않다고 하던데 혹시라도 물리는 일이 있다면 그 순간 제가 본능적으로 모기 잡듯 탁 쳐버리는 일만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침 몸을 편 순간 손을 갖다 대서 크기를 제대로 확인해 보았습니다. 여전히 작지만 처음 왔을 때보다는 확실히 많이 커졌습니다.
자도 갖다 대보았어요. 몸통은 1.3센티 정도, 다리 폭(leg spans)은 다리 쭉 늘이면 3센티 가까이 되겠네요.
참고로 타란툴라는 몸길이와 다리 폭을 따로 잽니다. 그냥 서 있는 거 말고 다리를 쭉 편 상태로 재야 해서 살아 있는 녀석으로는 확실하게 재기는 힘들다고 해요. 그래서 보통은 죽은 뒤 또는 탈피 껍질로 잰답니다.
카엥 크라찬은 성체 다리 폭이 평균 15-18센티 정도까지 클 수 있는데 그때가 너무 기대가 됩니다. 렌지도 그 정도 클 거고, 리니(그린보틀블루)는 그보다 좀 작은 걸로 알고 있어요. 나중에 28센티까지 클 수 있는 골리앗 버드 이터 종도 꼭 키워보고 싶네요.
이제 카엥이가 편하게 쉴 수 있게 본격적으로 집을 갈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카엥이가 여러 번 응가를 했을 예전 집의 코코피트는 전부 버리고, 새집에 깨끗한 코코피트를 넣어주었어요. 그런데 예전 집의 코코피트를 버리려는데 거미줄로 만든 터널 같은 것이 나왔습니다. 만지니 느낌이 좋아서 살살 비비는데 헉, 뭔가 바스락거리며 부서지는 소리가...!
이게 뭔가 했더니 세상에, 탈피 껍질입니다! 생전 처음 보는 타란툴라의 탈피 껍질. 그 어둡고 좁은 굴속에서 힘든 탈피를 했던 거였어요. 탈피 기간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밥도 그렇게 계속 안 먹은 거였고요. 기왕 굴 만들 거면 좀 넓게 만들지 정말 좁게 만들었더라고요. 탈피 공간이 너무 좁으면 끼여서 탈피 실패해서 죽기도 하던데 딱 맞게 자기가 잘 알아서 한 것 같습니다.
제가 엄지와 검지로 거미줄 동굴을 비빈 것 치고는 많이 부서지지 않고 형태가 꽤 남아 있습니다.
설마하니 굴 안에 탈피 껍질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이젠 새로운 사실을 배웠으니 다음엔 조심스레 뜯어봐야겠습니다. 타란툴라는 탈피 껍질 안쪽을 보고 암수 구별을 하는데 너무 작아서 뭐가 뭔지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대체로 수컷은 3-4년 정도 살고 암컷은 12-15년 정도 살기 때문에 기왕이면 암컷이면 좋겠습니다. (종에 따라 수컷인데도 10년씩 살기도 하고 암컷이 20년을 훌쩍 넘기는 일도 있습니다.)
이 당시 아래 사진에 보이는 저런 사육 케이스를 세 개 주문해뒀었기 때문에 여유롭게 케이스를 씻고, 집을 꾸며줄 수 있었습니다. 흙이 비어있는 부분은 자른 밀웜 같은 걸 깨끗하게 놓기 위해 마련해둔 공간인데 지금은 흙으로 꽉 채운 상태입니다. 제가 만들어 준 저 하늘색 은신처는 다음 탈피 때쯤 굿바이 하게 되겠군요. 타란툴라가 꽤 힘이 있기 때문에 저렇게 약하고 가벼운 은신처는 타란툴라가 일어서면 번쩍 위로 들리기 때문에 약간 무게감이 있는 게 좋아요. 사육장 안에 있는 장식물에 깔려죽는 일도 발생하니 은신처 또한 신중히 골라야 하겠죠.
걷느라 위로 올라간 다리가 깜찍하네요. 타란툴라 유체가 걷는 모습은 언제 봐도 우아하고 귀엽습니다.
위에서 보면 이런 모습이에요. 사방 10cm인 정육각형 케이스인데 사실 카엥이에 비해 조금 큰 집입니다. 그래도 금방 크니까 곧 딱 맞아질 거라 생각해요. 위에 달린 동그란 문은 정신 차리지 않으면 열어두고 깜박하겠네요. 타란툴라도 지네처럼 탈출해서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던데 정신 바짝 차려야겠어요.
걸을 때는 다리가 번갈아가면서 위로 휙 들려 올라가요. 저 모습을 보는 게 재미있어서 계속 꺼내고 싶은데 스트레스를 주지 않기 위해 그냥 이렇게 가끔만 봅니다.
이날 탈피 껍질만으로도 너무 놀랐는데 또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요. 여기저기 집을 탐색해보던 카엥이가 스스로 물통으로 가서 물을 마셨습니다! 사마귀들도 탈피 전후로 그렇게 물을 마시는데 타란툴라도 비슷한가 봅니다. (카엥이 몸 색이 밝은 것은 폰 카메라 필터 때문입니다. 원래 모습대로 까맣게 찍으니 형태가 안 보여서요.)
한참을 물을 마신 뒤엔 위로 위로. 그러다가 다시 내려와서 또 한참을 마셨답니다. 예전 집에도 물컵은 항상 있었는데 굴 밖으로 나올 생각을 못했던 걸까요? 살아 있는 것이 대견하기도 하고, 너무 오래 굶어서 안쓰럽기도 했어요.
그러나 이날도 결국 밥은 먹지 않았습니다. 타란툴라는 원래 탈피 후엔 밥을 안 먹으려고 합니다. 몸이 바짝 마르기 전까지는 밥을 줘서도 안 되죠. 유체의 경우 보통 탈피한 날로부터 3-7일 정도 몸이 마르길 기다려야 합니다. 제 경우 카엥이가 탈피한 것을 우연히 발견했기 때문에 정확히 언제쯤 탈피를 한 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일단 아까 사진에서도 나왔듯 독니가 까만 상태면 완전히 탈피 직후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탈피 직후는 독니가 하얀색이에요. 그런데 까맣다고 해서 밥을 줘도 괜찮다는 뜻은 또 아닙니다. 애매한 상황이었는데 다행히 카엥이가 알아서 밥을 거부했습니다. 이런 애들도 있는 반면 그냥 주는 대로 먹어서 독니를 망가트리는 경우도 있어요. 결국 사육자의 책임이 크다는 얘기입니다.
만약 제가 며칠 앞당겨서 집을 바꿔주기로 결정했다면 큰일날 뻔했다는 생각에 아찔합니다. 다음엔 타란툴라의 생명력을 믿고 좀 더 오래 인내심을 갖고 지켜볼 생각입니다. 고수들 보니까 2달 정도 얼굴 안 보이면 그제야 흙을 뒤져보더라고요. 저는 2달이나 기다리는 건 자신이 없는데 그렇게 오래 숨어 있는 일이 없기만을 바라봅니다. 그럼 카엥이의 소식은 다음에 또 전하도록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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