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29일
수컷 좀사마귀를 자연으로 보내 주고 난 다음 날, 새로운 절지동물 친구가 저에게로 왔습니다. 바로 킬로브라키스 카엥 크라찬(Chilobrachys spec. "Kaeng Krachan")이라는 타란툴라입니다. 조그만 유체이고, 희귀 동물 샵으로 유명한 벌러지닷컴에서 포켓몬 잡는 기분으로 Get했습니다. (실제면 좋겠지만 온라인으로요.)
우선 그 많은 타란툴라 종 중에서 제가 카엥 크라찬을 선택한 이유는 외모가 제 시선을 가장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에서 여러 사진들과 정보를 보다 보니 깔끔한 올블랙과 날렵해보이는 몸이 유난히 멋져 보였습니다. 타란툴라는 위협을 느끼면 엉덩이 털을 날린다는데 카엥 크라찬은 털도 날리지 않는다고 해서 바로 이 녀석이다 싶었습니다.
유체를 선택한 이유는 절지동물을 처음 키울 땐 잘 죽여 먹기 때문에 너무 비싼 개체를 들이지 않는 게 좋다고 하더군요. 꼭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처음부터 큰 타란툴라를 다룰 자신이 없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타란툴라라도 크기가 콩만한 녀석이라면 덜 무서울 것 같았고, 크는 동안 익숙해지면 괜찮을 거란 생각이었습니다. 솔직히 조금 천천히 커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뚜껑을 여니 위의 사진에서 보이는 모습이었습니다. 지금 보니 찌그러진 길거미 같은 것이 너무나 귀엽지만 저 당시만 해도 뚜껑을 여는 순간 깜짝 놀라서 절로 비명이 나왔었답니다. 타란툴라치고는 작을 뿐이지 그냥 거미로 생각한다면 꽤 큰 편입니다. 그래도 지네를 다루는 것에 비하면 쉬운 느낌이랄까요. 물리더라도 지네가 무는 것보다는 안 아프다고 들어서 훨씬 덜 무섭기도 합니다.
먼 길 오느라 힘들었을 것 같아서 작은 밀웜 조각을 하나 줬습니다. 배가 고팠는지 바로 입에 물더군요. 하는 짓도 귀엽고 박스에 실려오는 동안 휴지에 거미줄을 쳐둔 것도 너무 귀엽습니다.
이름은 카엥 크라찬이니 "카엥이"라고 지었습니다. 카엥이는 잠시 쉬게 두고 저는 얼른 집을 만들었습니다. 밀림펫에서 산 코코피트를 넣고 작은 분무기 같은 것의 뚜껑을 물그릇으로 사용했습니다. 작은 푸딩컵인데도 막상 카엥이를 넣어보니 꽤 커 보입니다. 물그릇도 제 손가락 한 마디 정도로 작은 것인데 카엥이 옆에 있으니 거대해 보이는군요.
타란툴라나 지네에게는 대부분 은신처가 필수라는데 저는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어서 잠시 이렇게 두기로 했습니다. 물그릇 역시 필수인데 타란툴라는 유체라도 절대 물에 빠지지 않는다고 해서 저렇게 해두었습니다. 반면 지네는 가끔 물 그릇에 얼굴을 박고 죽어 있는 경우가 있다고 해서 지네의 경우엔 스펀지에 물을 푹 적셔서 사육통 구석에 놓아두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크면 물그릇을 만들어 줄 생각입니다.
여기저기로 옮겨지니까 불안했던지 카엥이가 물고 있던 밀웜을 어딘가에 뱉어버리고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싱싱하게 살아있는 밀웜을 줘 보기로 했습니다. 언제나 영상으로만 보던 타란툴라의 먹이 사냥 장면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문제가 생겼습니다. 작은 밀웜으로 골라서 줬는데 막상 던져 놓고 보니 너무 큽니다. 아래 사진에서 보면 아찔한 크기의 밀웜이 꿈틀거리면서 카엥이의 아래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다시 밀웜을 꺼내기는 애매한 상황이 되어서 일단은 그냥 지켜 보았습니다. 혹시라도 밀웜의 이빨에 카엥이가 다치기라도 할까봐 조마조마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엉덩이에 거미줄은 왜 나와있는 건지...)
카엥이가 몸을 움찔거리면서 자기 아래 있는 밀웜에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습니다. 저를 포함해 모두 완전히 긴장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몇 초 후, 카엥이가 갑자기 밀웜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밀웜도 만만찮습니다. 오히려 카엥이가 공격당할 것 같은 분위기에 너무 놀라서 식은땀이 나려 했습니다.
불안하다 했는데 결국 사냥에 실패했습니다. 밀웜이 온 힘을 다해 펄떡거리자 결국 카엥이가 놀라서 물러서고 말았습니다. (계속 신경쓰이면서도 너무나 귀여운 엉덩이에 거미줄)
카엥이에게 몹시 미안한 마음에 얼른 밀웜을 반으로 잘라 주었습니다. 그리고 핀셋으로 카엥이를 살살 건드려서 밀웜 즙이 있는 쪽으로 가도록 해보았습니다. 다행히 맛있는 냄새를 맡은 건지 아까 사냥 실패에 대한 상처는 잊고 바로 밀웜 조각을 덥석 물었습니다. 너무나 뿌듯하고 안심이 되었어요.
카엥이는 음식을 입에 문 채로 한참을 돌아다녔습니다. 반으로 자른 밀웜임에도 물고 있는 것을 보니 너무 커서 또다시 미안해졌습니다. 저걸 과연 다 먹을 수 있을까 했는데 역시나 다음 날 보니 3분의 2정도만 먹고 남겨 두었더군요.
아래 사진은 다음 날 밀웜 찌꺼기를 청소하기 위해 카엥이의 집 뚜껑을 열었을 때의 모습입니다. 물그릇 주변에도 거미줄이 있고, 제가 은신처 대신 임시로 얹어 두었던 낙엽 조각들이 깔려 있습니다. 낙엽 아래에 숨어서 밥을 먹은 건지 밀웜 하체 찌꺼기는 왼쪽 낙엽을 들춰보니 있었어요. 오른쪽 낙엽에 흙 사이로 살짝 보이는 건 밀웜 상체인데 배가 불러서 건들지도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게 문제가 아니라 카엥이가 보이지 않습니다.
알고 봤더니 땅굴을 파고 들어가 있었습니다. 제가 은신처를 놓아주지 않아서이기도 하겠지만 타란툴라 유체들은 땅굴을 파고 들어가는 일이 흔하다고 합니다. 이 시기에는 숨지 못하면 극심한 스트레스가 와서 죽을 수도 있다고 하네요. 자기가 어리고 약한 걸 잘 알기 때문에 그런 큰 공포를 느끼는 것 같아서 안쓰러운 마음입니다.
그런데 숨긴 숨었는데 벽이 투명한 것을 생각지 못한 것 같습니다. (너 다 보여, 카엥아!) 사진을 자세히 보면 밥을 잔뜩 먹고 빵빵해진 엉덩이가 보입니다.
이날은 하루 종일 집을 만들더군요. 귀여운 털다리들을 열심히 움직이면서 말이에요.
그런데 곧 이런 모습조차도 볼 수 없게 되었답니다. 자신이 밖으로 보이는 것을 눈치채고는 벽까지 흙으로 덮어 버렸거든요. 그 뒤로 저는 아주 오랫동안 카엥이를 볼 수 없었습니다. 이삼일에 한 번씩 과격하게 먹이를 낚아채는 타란툴라를 볼 희망으로 가득했건만 그 뒤로 매일 흙만 바라보게 되었죠.
그 후로 벌써 한 달이나 지났네요.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 녀석에 대해 할말이 많은데 다음에 또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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